연산군의 통치: 형벌의 수위

연산군은 조선의 10대 왕으로, 그 치세는 조선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폭정과 광기로 인해 많은 이들이 고통을 겪었으나, 이러한 행위의 배경에는 그의 가정사와 정치적 상황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연산군이 왜 미치광이로 불리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배경과 원인을 살펴보겠습니다.

 

1.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

 

성종은 조선의 9대 왕으로, ‘경국대전’을 완성한 군주입니다.

‘경국대전’은 조선 왕조의 기본 법전으로, 성종의 치세 동안 완성되었습니다.

‘묘호’가 성종인데 ‘묘호’란 임금이 죽은 뒤 생전의 공덕을 기려 붙이는 칭호입니다

묘호란 칭호는 아무에게나 붙는게 아닙니다.

연산군은 성종과 중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난 적장자입니다.

적장자란 첩의 자식이 아닌 왕비의 첫째 아들로,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가진 자를 의미합니다.

연산군의 탄생은 성종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었으나, 윤씨와의 불화로 인해 이러한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연산군

2. 중전 윤씨의 비극적 운명

 

1479년 6월 1일, 윤씨의 생일에 성종은 다른 후궁의 처소를 찾았습니다.

이에 분노한 윤씨는 성종과 큰 부부싸움을 벌였고, 결국 성종의 얼굴(용안)에 손톱 자국을 남겼습니다.

이 사건으로 윤씨는 패서인이 되어 궁에서 쫓겨났습니다.

성종은 3년 후 윤씨에게 사약을 내려 죽였습니다.

연산군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자랐고, 자신의 어머니가 아닌 새 중전 정현왕후를 어머니로 알고 자랐습니다.

 

3. 연산군의 즉위와 초기 통치

 

3.1 왕위 계승과 초기 통치

 

연산군은 왕위에 올랐으나, 그의 통치는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견이 강하고 뜻대로 하고 싶어하는 성격이었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3.2 삼사의 역할과 반대

 

조선의 삼사(홍문관, 사간원, 사헌부)는 왕과 신하들의 잘못을 비판하고, 왕에게 자문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사헌부’는 관직에 있는 자를 관찰하는 기구인데 현재 검찰이고요

‘사간원’은 국왕이나 신하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이를 비판하는 기구입니다.

‘홍문관’은 왕과 토론하는 기관.경연을 준비하고 왕이 궁금해 하는 일에 자문하는 일을 맡았던 기관이 되겠습니다.

언론을 담당하는 이 세 기관을 일컬어서 ‘삼사’ 언론 삼사라고 했던 것입니다.

연산군은 삼사의 신하들로부터 많은 반대를 받았으며, 이는 그의 폭정을 낳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4. 연산군의 폭정

 

4.1 무오사화의 배경

 

연산군 즉위 4년 후, 그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신하들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무오사화’는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조선 최초의 사화입니다.

무오년에 사라고 하는 것은 선비 ‘사’자고 화라고 하는 화를 입다 할 때 ‘화’자 입니다.

그러니까 선비들이 무오년에 화를 입은 사건이란 뜻입니다.

 

4.2 사초 문제와 유자광의 역할

 

‘무오사화’의 발단이 시초는 사초에서 시작됩니다.

왕이 죽게 되면 왕 시절에 있었던 내용들을 다 정리를 하게되는데 이것을 ‘실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실록을 만들려면 기본적인 자료들이 있어야하는데  그걸 바로 ‘사초’라고 합니다.

그 사초에서 문제가 되는 내용들이 발견됩니다.

문제가 된 내용은 아래 3가지입니다.

1.’세조가 자신의 아들이자 성종의 아버지였던 의경세자의 후궁 권 씨를 불러들였지만 군부를 따르지 않았다.’

세조가 혼자가 된 자신의 며느리를 취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2.’자신의 형 문종의 아내였던 현덕왕후의 관을 무덤에서 파내 바다에 버렸다’

3.’단종의 시체가 함부로 버려져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고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단종의 시신을 방치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패륜적인 행위를 벌인 왕이 세조다 라는것을 역사에 기록하려고 했던것입니다.

이런 사초 문제를 적극적으로 확대하면서 사건을 키워간 사람은 공작정치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간신의 아이콘이라고도 불렸던 ‘유자광’입니다.
모함을 하는 걸로 출세를 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할아버지 세조를 비방하는 이 사초를 읽은 연산군은 화가 나게됩니다.

 

4.3 김일손과 김종직의 죽음

이런 내용을 쓴 사람은 김일손이란 사람이었으며  삼사의 무리들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해서 삼사를 때려잡을 수 있는 완벽하게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라고 연산군은 판단하게됩니다.

하지만 연산군이 크게 분노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김일손의 스승 김종직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김종직이 쓴 글이 하나 있는데 ‘조의제문’이라는 겁니다.

“나는 초 회왕 손심인데 서초패왕 항우에게 살해되어 침강에 빠뜨려졌다 하늘과 땅이 끝도 없듯 한도 어찌 다하리오. 회왕의 호는 지금까지도 떠돌아다니는구나”

단종이 세조한테 죽임을 당해서 버려졌는데 단종이 너무 불쌍하다 라는 내용입니다.

다시 한번 연산군의 할아버지 세조를 욕하는 겁니다.

유자강은 ‘ 조의제문’ 이 기록을 하나하나 해석까지 해가지고 연산군한테 이걸 바치면서“이 사람이 감히 이러한 부도한 말을 했다니 청컨대 법에 의하여 죄를 다스리옵소서 “<연산군일기>라고 말을 합니다.

삼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연산군은 이들 전체를 ‘붕당조성죄’ 로 엮어서 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렇게 김일손은 능지처사를 당합니다.

‘능지처사’란 머리,양팡,양다리,몸통 등 몸을 여섯 부분으로 찢는 형벌을 말합니다

그리고 조의제문을 작성한 김일손의 스승 김종직은 이미 6년 전에 병으로 사망한 상태이므로 형벌을 할수 없었기때문에 ‘부관참시’를 내립니다.

죽어서 땅에 묻힌 김종직의 무덤을 파가지고 관을 꺼낸 다음에 그 시신의 목을 밴 다음 그걸 거리에 걸어두는 형벌입니다.

이 일로 50여 명이 사형 유배 파직되고 나서야 조선 최초의 사화 선비들이 화를 입었던 사건 ‘무오사화’는 막을 내립니다.

 

마무리하며

연산군의 미치광이로 불리게 된 원인은 그의 가정사와 정치적 상황에 기인합니다.

어머니 윤씨의 비극적인 죽음과 연산군의 심리적 충격, 그리고 정치적 반대와 스트레스가 그의 폭력성과 광기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이해함으로써 연산군의 행위를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