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의 미치광이 행보 :참혹한 형벌,공포 정치

연산군은 조선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왕 중 하나로, 그의 폭정과 광기는 조선을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가 왜 이러한 길을 걷게 되었는지 역사 속 숨겨진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1.연산군의 권력 남용

 

연산군은  권력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데 써 버립니다.

금표 안에 들어온 사람은 ‘기훼제서율’이라고 하는 형벌로 처참하겠다 공표합니다.

‘도성 사방에 백 리를 한계로 모두 금표를 세워 안에 있는 주현과 군읍을 폐지하고 주민을 철거시킨 다음 사냥터로 삼고 수백 리를

풀밭으로 만들어 금수를 기르는 마당으로 삼았고 여기에 들어가는 자는 목을 베게 하였습니다.‘

금표는 한강 북쪽으로는 파주 양주 포천 한강 남쪽으로는 김포에서 경기도 광주까지 약 40킬로미터까지 있었습니다

연산군은 향락뿐만 아니라 사치에도 빠져들게 되면서 무오사화 이후 재위 5년부터는 나라가 걷은 세금보다 쓰는 돈이 더 많아집니다.

무오사화 이후에 바짝 엎드렸던 신하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결국 들고 일어납니다.

연산군

2. 연산군의 복수: 폐비윤씨의 억울한 죽음을 둘러싼

 

2.1 ‘갑자사화’

 

연산군 8년 삼정승 (영희정 좌의정 우이정)이 10회 10조 라고 해서 연산군이 과하게 진상을 요구하고 재정을 함부로 쓰는 걸 비판하면서 들고 일어납니다.

연산군은 ‘이것 또한 하극상이구나’라고 하면서 경고를 하게되면서  다시 연산군과 삼사가 더 팽팽한 긴장감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연산군은 삼사고 대신이고 할 것 없이 자신의 심기를 꺼느리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처벌합니다.

다시 한번 조정에 피바람이 불게 됩니다..

‘갑자사화’는 한 부자 (임사홍 임승재 )에게서부터 시작되게 됩니다.

피바람이 시작된 1504년 3월 19일 밤,연산군은 임승재의 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임사홍의 얼굴이 계속 어두워지자 연산군이 “왜 그러시오?”라고 묻습니다.

“전하 폐비 윤씨가 원통하옵니다.”라면서 임사홍이 입을 엽니다.

바로 연산군 어머니 폐비 윤 씨의 죽음의 전모를 밝히기 시작한 겁니다.

“성종의 후궁 엄씨와 정 씨가 폐비를 중상모략해서  폐비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밝히게 됩니다.

 

2.2 엄씨와 정씨의 비참한 죽음

 

이야기를 듣자마자 자리를 차고 나가서 궁궐로 바로 들어갑니다.

그 날 밤에 엄 씨와 정 씨를 대궐 뜰에 결박하여 놓고 손수 마구치고 짓받다가  엄씨와 정씨의 아들들인 ‘향’과 ‘봉’을 불러 엄씨와 정씨를 가리키며 이 죄인을 치라하니 항은 어두워서 누구인지 모르고 치고 봉은 마음속의 어머니임을 알고 차마 장을 대지 못하니 왕이 불쾌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마구치되 갖은 참혹한 짓을 하여 마침내 죽이게됩니다.

그들의 시신은 젓갈 형태로 만들어져 산과 들에 뿌려지게됩니다.

 

3.연산군의 공포정치 :잔혹한 형벌

 

약 7개월에 걸쳐 폐비 윤 씨의 죽음에 찬성했거나 동조했거나 묵인한 자들 모두 끌려 나와 죄값을 치르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빼앗기고 유배를 가고 사형을 당합니다.

피해자만 무려 200여 명에 달할 만큼 연산군의 복수는 끝을 보이지 않았고, 궁궐에 있던 수많은 신하가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리는 겁니다.

연산군은 점점 제어할 수 없는 그런 미치광이가 되고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연산군은 신하들에게 무시무시한 선전포고를 합니다.

‘위를 능멸하는 풍속을 이루었으니 고치지 않을 수 없다.
위를 능멸하는 죄를 범하는 일이 있으면 경중을 논할 것 없이 죄지어 경계할 줄을 알게 하겠다. ‘<연산군일기>

왕의 권위에 앞으로 도전하는 자는 어떤 일이라도 처벌하겠다는 것입니다.

연산군 최악의 공포 정치의 서막이 열린 겁니다.

연산군은 조선 역사상 유례 없는 방법으로 형벌을 가합니다.

연산군은 죽은 사람을 또 한 번 죽이는 “쇄골표풍”이라는 끔찍한 형벌을 만듭니다.

이 쇄골 표풍은 뼈 골자 바람 풍 자.

무덤을 파내서 시신을 관에서 꺼내서 해골을 부수고 가루로 만든 다음 바람에 날려보낸다는 뜻입니다.

도덕과 인륜이라고 생각했던 그런 나라에서 일어난일입니다.

군주로서의 권위를 드러내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은 이런 엄격하고 무서운 형벌을 내리는 거다라고 생각한것입니다.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브레이크가 없는 기관차처럼 폭주를 거듭합니다.

4.연산군의 향락

 

주변 신하들의 입을 틀어막고 국정은 내팽겨쳐 두고 술과 여자에 빠지게 되면서 스스로 왕실의 권위를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행동을 저지르게 됩니다.

 

4.1 운평과 흥청

 

연산군의 기생사랑은 유별났습니다.

전국의 기생들을 불러 모아서 ‘운평’이라 이름 붙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예쁘고 가장 노래 잘 부르는 운평들과 춤을 잘 추는 자를 뽑아서 ‘흥청’이라고 불렀습니다.

운평에서 뽑힌 사람들을 ‘흥청’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흥청은 궁궐에서 연산군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수시로 재물과 노비를 내린 건 물론이고 그들의 부모를 한양으로 불러서 집과 땅을 줬을 정도입니다,

연산군 10년에 운평과 흥청의 수는 1000명으로 증원되었고 이후에는 만 명으로 늘어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연산군이 만든 ‘채홍사’라는 새로운 관직이 있었습니다.

채집할 때’채’ 자와 붉을 ‘홍’ 자로 여성을 상징합니다.

연산군은 신하들을 채홍사로 임명해서 전국에서 미녀를 뽑아오라고 명을 임사홍과 임승재 에게 맡깁니다.

이들 부자는 채용사로 임명돼 가지고 각지에서 미녀들을 뽑아가지고 궁궐로 데려옵니다.

전국의 기생들을 끌고 간 건 물론이고 온 집안을 샅샅이 수색해 가지고 백성들의 아내와 딸 게다가 양반의 첩까지도 끌고 갑니다.

임승재는 병으로 세상을 뜨기 전 한 가지를 아쉬워하면서 연산군한테 유언을 남겻습니다.

“죽어도 여한이 없으나 전하께 미인을 바치지 못한 것이 한이되옵니다.”

임승재는 심지어 이미 시집을 갔던 자신의 누이동생까지도 연산군한테 바쳤다고 합니다.

 

마무리하며

 

연산군은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과 권력 투쟁 속에서 점차 폭군으로 변해갔습니다.

그의 폭정은 조선을 혼란에 빠뜨렸고, 결국 그 자신도 파멸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연산군의 이야기는 권력의 무상함과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비극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