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패륜왕을 무릎 꿇린 인목대비

이 글에서는 조선의 패륜 왕 광해군과 그의 최후에 대한 역사적 숨겨진 사건들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광해군의 치세 동안 벌어진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비극적인 사건들을 중심으로, 광해군의 비극적인 생애와 말로를 설명합니다.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갈등은 단순한 개인적 불화가 아닌, 정치적 권력 싸움이었습니다.

이는 그들의 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1.광해군과 인목대비의 비극적 관계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관계는 단순히 왕과 대비의 관계를 넘어 조선 역사상 가장 비극적이고 복잡한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광해군의 통치 기간동안 벌어진 여러 사건들, 특히 인목대비와 관련된 일들은 그들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위협하는 존재로 여겼고, 인목대비는 그런 광해군을 방어해야만 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처음부터 불안정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갈등은 심화되었습니다.

광해군

1.1 유릉 저주 사건

 

유릉 저주 사건은 영창대군의 궁녀들이 유릉에서 저주를 행했던 사건으로, 당시 선조의 첫 번째 왕비인 의인왕후의 귀신이 선조를 괴롭혔다고 전해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인목대비가 아들 영창대군의 궁녀들을 관리하면서 의인왕후의 무덤에서 저주를 행하게 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의인왕후의 귀신이 선조를 괴롭혔다는 소문은 궁궐 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는 곧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귀신의 저주가 왕실의 불운을 가져온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건은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1.2 광해군의 의심과 처벌 빌미

 

광해군은 이 사건을 통해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연루시켜 그들을 처벌할 빌미를 삼았습니다.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 김씨의 묘에 저주가 행해졌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는 사형에 이를 정도로 중대한 문제로 여겨졌습니다.

광해군은 김자람이 조종하고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의심을 품고,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비롯한 세 명을 엮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은 광해군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철저히 계획하고 행동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려고 했습니다.

 

2. 광해군의 처벌 :인목대비 집안의 파멸

 

2.1 인목대비 집안의 몰락

 

광해군은 인목대비 집안을 철저히 파멸시키기 위해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을 사살하고, 남자 형제들을 장형으로 처벌했습니다.

인목대비의 어머니는 서인으로 강등되어 척박한 제주도로 유배를 갔습니다.

이렇게 인목대비의 친정은 역모의 중심축으로 몰리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도 역모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광해군은 인목대비와 그 가족을 철저히 파멸시킴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 했습니다.

이는 그의 권력욕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인목대비의 친정은 완전히 몰락했고, 이는 인목대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2.2 영창대군의 비극적 운명

 

광해군은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패하고 서인으로 강등시켰습니다.

서인으로 강등된 영창대군은 왕실 족보에서 삭제되었고, 평민으로서 궁 밖에서 평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결국 영창대군은 1614년 2월,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했으며, 이는 영창대군이 9살에 불과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광해군은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 데에 있어서도 어린 아이를 가차없이 처벌할 정도로 냉혹했습니다.

영창대군의 비극적 운명은 광해군의 잔혹성을 잘 보여줍니다.

이는 또한 인목대비에게 큰 상처를 안겨주었습니다.

 

3. 패륜왕 광해군의 서막: 인목대비의 유폐와 고난

 

3.1 인목대비의 유폐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유폐시키고, 그녀가 무슨 짓을 할 수 없도록 감찰자를 붙였습니다.

인목대비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녀는 유폐 중 느낀 고통을 시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목이 헐고 가죽이 헤어져 잠자기만 좋아하니 쟁기질 써레질 이미 끝나고 봄비도 만족스러운데 주인은 어찌 고생스럽게 또 채찍을 더하는가? “

인목대비가 훗날 남긴 이 시는 늙은 소를 가엽게 여기는 내용이라 해서 흔히 “민우시”라고 불립니다.

인목대비는 정치 싸움에 휘말린 자신을 늙은 소에 빗대고 광해군을 늙은 소에 채찍질하는 주인에 빗대어 시를 지은 겁니다.

인목대비 자신은 힘이 빠진 지 오래인데 광해군이 계속 자신에게 채찍질한다.괴롭힌다고 표현한 시입니다.

유폐 생활 동안 인목대비는 엄청난 심리적 압박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녀는 감시와 통제 속에서 살아야 했고, 이는 그녀의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인목대비의 유폐 생활은 그녀의 정신적 고통을 극대화시켰습니다.

 

3.2 서궁으로의 강등

 

개축옥사가 일어난 지 4년째 되던 1617년 조정에서는 인목대비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는 움직임까지 일어납니다.

“전호를 삭제하고 궁전의 호의를 없애며 온 나라 사람과 함께 폐위시켜야 합니다.”라고 신하들이 상소를 올립니다.

즉 인목대비를 쫓아내자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1618년 1월 28일,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서궁으로 강등시키고, 그녀의 지위를 낮췄습니다.

인목대비는 경운궁에 유폐되었고, 광해군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며 문안 인사조차 끊었습니다.

이는 인목대비의 존재감을 완전히 무시한 처사였습니다.

인목대비는 서궁에서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녀는 왕비로서의 존엄성을 잃었고, 이는 그녀에게 큰 모욕이었습니다.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철저히 무시하고 그녀의 존재를 지워버리려 했습니다.

 

4. 광해군 측근의 움직임: 인목대비 암살 시도와 인조 반정

 

4.1 암살 시도

 

1622년, 경운궁에서 인목대비를 죽이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광해군의 측근인 백대영과 이위경이 “나례희”를 핑계로 경운궁에 침입하여 인목대비를 암살하려 했으나, 궁녀가 대신 목숨을 잃으며 인목대비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4.2 인조반정

 

1623년 3월 12일, 누군가 경운궁을 꽝꽝꽝꽝 두드립니다.

이때 군사를 대동한 몇몇 신하가 우르르 경운궁을 찾아와서 나라가 뒤집혀졌다고 말합니다.

바로 “인조 반정”이 일어난 겁니다.

이때 반정의 우두머리에 선 능양군은 광해군의 조카였습니다.

선조의 다섯째 아들이자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정원군의 아들이었습니다.

반정이 일어나던 날 광해군을 폐위시키려는 세력은 천여 명의 군사를 동원해서 창덕궁을 순식간에 장악합니다.

광해군은 반정군이 오기 직전까지 술자리를 즐기다가 반정군이 들이닥치자 궁궐 담을 넘은 후 환관 등에 업혀서 도망쳤다고 합니다.반감이 더 커지는 거죠.

신하들이 반정을 일으켜서 광해군을 폐위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창덕궁을 장악한 능양군은 신하들에게 인목대비를 당장 창덕궁으로 모셔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처음 반정세력이 찾아왔을 때 인목대비는 잠긴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합니다.

반정 세력은 대비 전앞에 엎드려서 상황을 설명합니다. .

이렇게 인조반정이 일어나며 광해군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능양군을 마주한 인목대비가 상상을 초월할 폭한 선언을 합니다.

“먼저 이혼 부자의 머리를 가져와서 내가 직접 살점을 씹은 뒤에야 책명을 내리겠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역적의 우두머리 “역괴”라고 부르면서 “직접 국문해야겠다”고 말합니다.

그동안에 수모로 쌓인 한과 울분, 분노를 이 순간에 다 터뜨린 겁니다.

“연려실기술” 에  당시 상황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정 세력은 인목대비를 창덕궁으로 모셔와 광해군을 폐위시키기 위한 명분을 얻고자 했습니다.

인조 반정은 광해군의 잔혹한 통치에 대한 반발이었으며, 이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인목대비는 반정 세력을 통해 자신을 구원받았으며, 이는 그녀의 삶에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5. 광해군의 최후

 

5.1 광해군의 폐위와 인목대비의 복수

 

반정 직후 능양군은 인목대비와 광해군을 마주하게 됩니다.

광해군은 초라한 물골로 작고 까만 가마를 타고 인목대비가 있는 경운궁으로 끌려옵니다.

한때 용상에 앉아서 인목대비의 자존심과 집안을 짓밟았던 광해군은 초라한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앉습니다.

광해군은 인목대비의 명령으로 폐위되었고,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죄목 36가지를 교지로 써서 그의 폐위를 선언했습니다.

“선조의 아들이라면 나를 어머니로 여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광해는 우리 부모를 형벌하여 죽이고 우리 일가들을 몰살시켰으며 품속에 있는 어린 자식을 빼앗아 죽이고 나를 유폐하여

곤욕을 치르게 하였으니 그는 인간의 도리가 조금도 없는 자이다.”

자신의 친정을 몰살한 죄, 아들 영창군을 빼앗아 죽인 죄, 그리고 자신을 유패해 곤욕을 치르게 한 죄를 거론하며 마지막 문장에

“이에 그를 폐위시키노라”라고 적습니다.

이는 인목대비가 5년의 유폐 기간 동안 품었던 복수의 순간이었습니다.

광해군의 폐위는 인목대비에게 큰 승리였습니다.

그녀는 광해군을 폐위시키면서 자신의 복수를 완성했습니다.

이는 인목대비에게 큰 위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 광해군을 무너뜨렸습니다.

 

5.2 인목대비의 최후

 

인목대비는 왕대비의 지위를 회복하고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1632년 6월 28일,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목대비의 사망 소식은 제주도에 유배된 광해군에게도 전해졌고, 광해군은 어머니의 죽음에 상복을 입고 예를 다했습니다.

광해군은 제주도에서 6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마무리하며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이야기는 조선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복잡한 관계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인목대비의 유폐와 고난, 광해군의 패륜적 행동은 역사 속에서 계속 회자될 것입니다.

이번 글을 통해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비극적 운명을 다시금 되새기며, 그들의 이야기를 기억하고자 합니다.